[와이뉴스] 1796년(정조 20) 창건하고 1971년 수리된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봉수대이며 팔달구 팔달로에 위치한다. 길이 24자(약 7.4m), 너비 54자(약 16.7m) 규모이고 아래에서부터 석축 5층과 벽축 62층을 쌓았으며 전체 높이 25자(약 7.7m)이다. 성 밖으로 현안 2개, 누혈 1개, 포혈 18개, 총안 18개를 설치했고 성안 쪽은 벽돌로 담장을 둘렀고 가운데 작은 홍예문이 있다. 대개 봉화대는 높고 인적 드문 곳에 자리잡았으나 화성은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체계다. 총 다섯 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교전 상태인 경우 봉수 5개를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봉수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체계적 설치와 관리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전한다고. 봉수 노선은 5개 있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출발, 제2로는 경상도 동래 다대포에서 출발, 제3로는 평안도 강계에
[와이뉴스] 4.16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돼 침몰한 사고다. 탑승 476명을 수용한 청해진해운 소속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으로 4월 16일 오전 8시 58분 병풍도 북쪽 20km 인근에서 조난 신호를 보냈다. 참사로 시신 미수습자 9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했다. 참사 원인으로 무리한 화물적재와 증축,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 관제 허술과 초기 대응시간 허비, 초동대처 실패 등을 꼽는다. 2015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가 출범했다. 세월호참사 직후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 출범했으나, 당시 새누리당의 반대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등 조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조위는 활동 기한 연장 요청에도 당시 정부와 새누리당 반대 속에 2016년 6월 활동을 종료했다. 세월호 유가족과 416교실 지키기 시민모임 등은 2015년 10월 26일부터 2016년 4월 8일까지 6개월 가량 교실 존치를 위해 경기도 교육청 앞 피켓팅을 진행했다. 2016년 5월 9일 정부합동분향소
[와이뉴스] 구 경기도청사 벚꽃길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각광받는 벚꽃 명소다. 팔달산을 둘러싸고 경기도청사 후문에서 시민회관-화서공원까지 벚꽃길이 이어진다. 청사 주변 팔달산 일대에는 벚꽃은 물론 살구꽃, 목련, 개나리, 진달래, 명자꽃, 앵두꽃 등 다양한 봄꽃들을 만날 수 있다. 또 팔달산 중턱을 한 바퀴 도는 코스도 산책길로 주목 받는다. 1967년 청사 입주 당시 주변에 심은 왕벚나무 200여 그루가 매년 3월 말부터 4월 초 만개하는 벚꽃명소로 1987년부터 매년 도청 주최로 축제를 이어왔다고 전한다. 왕벚나무가 만개하는 4월 초에는 문화공연을 하고 체험 판매 부스 등을 운영하는 경기도청 봄꽃축제도 개최됐다. 이는 연간 20만 명 이상이 찾는 행사로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내다봤다고. 경기도청 봄꽃축제는 코로나 팬데믹 지속세와 도청사 이전 등으로 2020-2022년에는 열리지 않았다. -자료참조: 경기도 멀티미디어자료실 등 ※ 촬영: 2024.04.10.
[와이뉴스] 도시는 편리하다. 자동차와 도로의 발달로 정작 도시 속에서 인간의 발길 닿는 곳은 줄어 들었다. 는 곳이 있다면, 육교. 수원시 영통구 느티나무골 육교는 1999년 준공됐다고 전해진다. 길이 61m, 폭 30m, 높이 5m로 스틸로 만들어졌다고. 영통구가 10여 년 전 측정한 이용도 결과 느티나무골육교는 4천100명 정도가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영통을 대표하는 구조물로도 꼽혀 철거가 논의됐으나 남게 됐다고. 도시는 여러 모로 편리하지만,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곳은 이상적이다. 작은 광장 같기도, 공원 같기도 한 육교라면 왕복 10차선 위의 다리도 산책길이 될 듯.
[와이뉴스] 2024년 4월 10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투표진행상황에 따르면, 10일 오후 3시 현재 경기도 전체 투표율은 58.6%며 시도별 투표율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과천시로 69.1%다. 다음으로 성남 분당구 66.6%, 안양 동안구 65.1%, 용인 수지구 64.9% 순이다. 대한민국헌법 제41조는 국회는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고 밝힌다. 법 제1조 2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1원 1표'에서 '1인 1표'가 되기까지 많은 투쟁과 피의 역사가 있었다. 남은 건 선택뿐이다. 후보자와 정당 차원이 아니라 잠깐의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극복하고 투표를 하느냐, 아님 주인된 권리를 포기하느냐 하는.
[와이뉴스] 처인구 모현읍에 있는 고려 후기 관리이자 학자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로, 1972년 5월 4일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묘역 입구 신도비는 1696년 건립됐으며 송시열이 찬(撰)하고 김수항이 글을 썼으며 정몽주 충절과 높은 학식을 적었다고 한다.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했고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거치다 1390년 수문하시중이 됐다고 한다.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고 성리학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에 가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동방이학 시조로 추대된다고. 고려 말 정도전, 조준 등이 세력이 커지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이방원의 자객에게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일설에 따르면, 순절 후 개성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 경북 영천으로 이장할 때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명정이 바람에 날아갔다. 지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날아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 보니 지금의 이석형 묘에 떨어졌다. 사방을 둘러보던 지관이 이곳이 훌륭한 명당임에 감탄하며 이는 포은 선생 스스로 마련한 명당이니 이곳에 안장해야 한다고 일러, 이곳에 묘를 썼다
[와이뉴스] 4.3사건의 발단은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면서부터였다. 이후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검속과 탄압, 남로단의 무장봉기, 계엄령 선포와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며 끝을 맺었다고 한다.* 분명 아픈 역사이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다. "과거를 잊고 산다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제주4.3 아픈 역사 속에서도 (중략) 학살 현장을 추모공원으로 조성하고자 뜻을 모았다.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기약하고자 함이다." - 제주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 추모글 중에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와이뉴스] 만석거(萬石渠 저수지)는 수원시 북문 밖 공설운동장 북쪽에 위치한다. 원래 둘레 1.28km 규모로 수구, 수갑 등의 당대 최신 기술이 반영된 수리시설이었다. 1795년(정조 19) 축조됐으며 현대에도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6년 12월 26일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됐다. 1997년 만석공원 조성으로 저수지의 일부가 매립돼 원래 규모보다는 축소됐다. 1794년 극심한 가뭄으로 정조는 농업개혁을 위한 혁신사업으로 수리시설 조성을 명했다. 1795년 윤2월 장안문 북쪽 황무지를 개간해 국영농장 둔전을 만들고 농업용수를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는 만석거 조성을 하게 된다. 축조 당시 연꽃을 심었으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남쪽 언덕에 영화정을 세웠다고 한다. 조기정방죽, 조귀정방죽, 조개정방죽, 일왕저수지, 북지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현재는 만석공원으로 시민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공원은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 시민공원으로 만석거를 중심으로 한다. 분수대, 휴게 시설, 다목적 운동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축구장 등의 스포츠 공간, 야외음악당, 수원시립미술전시관 등이 있다. -자료참조: 지지씨, 경기도메모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와이뉴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1981년 7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됐다. 해발 24m 낮은 구릉 정상부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고 있는 평지성으로 평면 형태가 긴 사각형 모양이고, 성벽 중간 지점이 약간 돌출돼 있다. 성의 둘레는 337m이며 성벽 중심부 남북 길이는 116m, 동서 길이 81m, 내부 면적은 5,964㎡다. 축성 시기 관련해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삼국시대 축성설은 도적이 심해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과 신선 도승(道僧)이 거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해온다고. 통일신라시대 축성설은 당나라 말기 한림학사 임팔급*이 간신의 참모를 당해 이를 피하고자 팽성으로 망명해 농성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견해다. 고려시대 축성설은 고려시대에 토성이 많이 축조된 점, 인근 처인성과 농성의 축성법 및 입지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고. 조선시대 축성설은 임진왜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다. 2003년 조사 결과 동문지와 외황 하층에서 고려시대 토기와 기와, 분청사기 등이 출토돼 농성의 고려시대 축성설이 힘을 얻고 있다. 평지에 만든 성이지만 평상시에는 이용하지 않고 유사시 주
[와이뉴스] 금광면 신양복리 복거(福巨) 마을의 옛 지명은 복호리(伏虎里)였다. 뒷산의 형세가 호랑이가 엎드려 앉은 형세라 하여 호동(虎洞)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복거리로 불렸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풍요로움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중심의 느티나무는 수령 400년이 넘는 보호수로 오랜 마을 역사를 말해주고, 가을이면 감나무 홍시가 시골 정취를 자아낸다. 안성시와 두리마을운영위원회가 주최하고 대안미술공간 소나무가 시행한 '아름다운 미술마을 만들기'는 행정안전부 '살기좋은 지역 만들기(2007-2009)'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행됐다. 꾸미기 주제는 마을 유래와 여유로운 삶에의 소망을 담아 '호랑이를 기다리며'로 하고 민화를 통해 소박함, 예술성 등을 마을 주민과 예술가, 지역 대학들과 협업으로 표현했다. -자료참조: 안성시 등 ※ 촬영: 2024.03.11.
[와이뉴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고속도로 무인수납 영업소 현황(2023.7)은 전국 164개소에 달한다. 강원 23개소, 광주전남 24개소, 대구경북 21개소, 대전총남 23개소, 부산경남 16개소, 수도권 25개소, 전북 14개소, 충북 18개소 등이다. 교통카드 기능이 탑재된 신용카드로 정산하는 경우, 노인이나 장애인 등이 일부 불편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도로공사의 인원감축에 따라, 2012년부터 무인정산 시스템으로 전환한 결과라고 전해지는데, '사람'은 없고 '기계만'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실패'가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와이뉴스] 남양교회에서 파견된 김응태의 전도를 받은 정창하 등이 1905년 3월 10일 예배를 본 것을 계기로 창건됐다.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고 1918년 동석기가 남양교회에 부임해 제암구역이 독립되면서 수촌교회는 제암교회와 같은 구역에 소속됐다. 제암교회와 함께 1919년 3·1운동 기간 중 일제에 피해를 당한 대표적 교회로, 1919년 4월 일제에 의해 교인이 학살되고 교당이 전소됐다. 당시 소실된 수촌교회 위치는 현재 교회 앞에 있는 개인주택 터로 추정된다. 1919년 전도사 김교철은 수촌교회 출신으로, 기독교인 안종후 홍원식과 협의 후 4월 3-4일 수촌리 교인과 주민을 인솔해 깃발을 앞세우고 장안면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가 수촌리 청년들이라고 생각한 일제는 4월 15일 새벽 보복에 나서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를 전소시켰고 많은 주민이 총검에 희생됐다. 또 수인이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고, 옥고를 치렀다. 방화로 전소된 예배당은 1922년 4월 아펜젤러와 노블의 지원을 받아 초가 8칸으로 신축됐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1953년 3월 목조 예배당(20평)을 신축했고 1965년 6월 창립
[와이뉴스] 제암교회는 1905년 8월 5일 아펜젤러에게 전도 받은 안종후가 자신의 집에서 예배모임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31일 제암리 인근 발안 장터에서 약 1천 명이 모여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했다. 4월 1일 밤에는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됐고 3.1운동 보복 행위가 시작됐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몇몇 마을 사람만 발안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 강연이 있다며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도록 강제했다. 이어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총칼로 학살한 뒤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5시간가량 타올랐다고 한다. 뛰쳐나오거나 달아나는 사람들을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됐다. 일본군경의 방화로 민가 31호가 불탔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