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기_어때] ㉜화성시_수촌교회

 

[와이뉴스] 남양교회에서 파견된 김응태의 전도를 받은 정창하 등이 1905년 3월 10일 예배를 본 것을 계기로 창건됐다.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고 1918년 동석기가 남양교회에 부임해 제암구역이 독립되면서 수촌교회는 제암교회와 같은 구역에 소속됐다.

 

제암교회와 함께 1919년 3·1운동 기간 중 일제에 피해를 당한 대표적 교회로, 1919년 4월 일제에 의해 교인이 학살되고 교당이 전소됐다. 당시 소실된 수촌교회 위치는 현재 교회 앞에 있는 개인주택 터로 추정된다. 

 

 

1919년 전도사 김교철은 수촌교회 출신으로, 기독교인 안종후 홍원식과 협의 후 4월 3-4일 수촌리 교인과 주민을 인솔해 깃발을 앞세우고 장안면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가 수촌리 청년들이라고 생각한 일제는 4월 15일 새벽 보복에 나서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를 전소시켰고 많은 주민이 총검에 희생됐다. 또 수인이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고, 옥고를 치렀다.

 

 

방화로 전소된 예배당은 1922년 4월 아펜젤러와 노블의 지원을 받아 초가 8칸으로 신축됐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1953년 3월 목조 예배당(20평)을 신축했고 1965년 6월 창립 60주년을 맞아 양옥 예배당(57평)을 신축했다. 

 

복원된 옛 예배당은 1986년 5월 20일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다. 규모는 전면 7.33m 측면 4.93m이고 내부는 마루와 방 2개, 부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국의 독립의지와 일제 식민통치 실상을 드러내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 받는다.

 

 

 

 

-자료참조: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성시, 화성3.1운동만세길, 한국관광공사, 경기문화재단 등 
※ 촬영: 202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