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뉴스] 시청사 본관 1층 로비에서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속도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는 듯하다. 안내 데스크에 물으니 로봇이라 한다.
[와이뉴스] 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적어도 2013년부터 24시간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야간에는 건물 안 의회 내부와 이어지는 지점의 문(셔터)을 닫아 둔다고. 이미 십 년이 넘게 열림 문화를 실현하고 있던 것이었다. "다르더라도 다 함께 화합하고 어우러지며 나아가야 한다"는 집행부 수장의 기조와도 얼핏 맞닿아 있는 듯도 하다.
[와이뉴스] 구 경기도의회(현 경기도소방재난본부) 근방 언덕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도로명 주소로 정조로 777번길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팔달산(145.5m) 둘레길이라 보면 편하다. 수원화성, 수원시민회관, 중앙도서관, 팔달산 지석묘군, 서남각루, 서장대, 정조대왕 동상, 약수터, 대한독립기념비, 수원향교 등 풍부한 주변 볼거리를 보유했다. 수원문화재단에 따르면 신청 시 팔달문 안내소를 통해 문화관광해설도 가능하다. 화성어차 주행로이기도 하다. 오르기 부담되지 않는 언덕만 도달하면 대체로 평지인 산책길을 편안히 걸을 수 있다. 까치, 청설모, 비둘기, 길고양이 등 동물들과 사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의 정취가 일품이다. -자료 참조: 수원문화재단, 수원시 등 ※ 촬영: 2025.04.28.
[와이뉴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지하 공영주차장에 국가유공자 우선 주차 구역을 설치 운영 중이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적극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주차 편의와 안전을 고려해 주차장에서 시민회관 방면의 엘리베이터 앞에 주차면을 확보 및 설치하고 '국가유공자 우선' 문구를 표시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른 국가유공자 대상요건은 전몰군경, 전상군경, 순직군경, 공상군경, 무공수훈자, 보국수훈자, 6·25참전 재일학도 의용군인, 4·19혁명 사망자, 4·19혁명 부상자, 4·19혁명 공로자, 순직공무원, 공상공무원, 국가사회발전 특별공로 순직자·상이자 및 공로자, 전투종사군무원등에 대한 보상, 개별 법령에 의거 등록되는 국가유공자, 6·18자유상이자에 대한 준용 등이다. 이 외에도 광명시 주차장 설치 및 관리 조례에는 장애인 전용주차구획의 설치(제20조), 어르신 주차구획의 설치(제20조의2), 가족배려주차구획의 설치기준 등(제20조의3)이 명시되어 있다.
[와이뉴스]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형성됐으며 태행산과 삼봉산 기슭에 자리한다. 초기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삼십여 가구가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움막집에 기거하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오래된 가마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해 때 여느 신앙 교우촌처럼 이곳도 생계 유지를 위한 옹기를 제작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고. 조선 제2대 교구장인 성 엥베르 주교(1796-1839) 사목 활동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며 이 곳에 당시 엥베르 주교의 명에 따라 본당 설립을 위해 닦아 놓았던 터가 남았다. 화성시 비봉면 쌍학길 319 위쪽으로 위치하고 예부터 천주교 미사를 자주 지냈으며,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깊은 신앙심을 지녀 적잖은 성직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지명유래집'에 쌍학리 유래가 전한다. 마을을 지나던 임금이 산의 형세가 두 마리 학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다른 한 편은, 백학이 무리 지어 두 곳에 서식했는데 한 곳은 백학, 또 다른 한 곳은 백학의 동쪽이라고 하여 동학리로 불렀고 후에 이 두 곳을 합쳐 쌍학리가 됐다고 한다. -2025.05.08.
[와이뉴스] 이 땅에 야구가 처음 자리를 잡은 건 1896년 미국인 경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이어 1906년 조선인 최초의 경기, 1907년 현 휘문고 야구부 창설, 1912년에는 조선야구 최초로 일본 원정 경기가 있었다. 이어 야구는 한국의 대표 인기 스포츠로 자리 매김해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등 국가적 위상을 높임은 물론, 남녀노소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며 저력을 보이고 있다. 실상 야구는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과 코치진과 아울러, 구장을 관리하는 스태프, 구단(주)를 뛰어넘어 3-4시간 이어지는 경기 내내 열렬한 응원을 펼치는 팬들이 있어 존재 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와이뉴스] 언제든 보면 기분 좋아지는 뷰 봄에 보면 더 예쁠 풍광 겨울에 보아도 예쁜 뷰 마치 남해의 한 언덕배기 같지만 경기하고도 안성 호수와 하천이 빚어내는 마음 편해지는 뷰들 -2025.02.04. 안성 고삼호수 / 봉산교
[와이뉴스] 왕복 6차선 도로 한복판. 개 한 마리가 유유자적 앉아 있다. 지나는 차들 또한 앉아 있는 개의 한낮의 '광합성'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 개는 차들의 움직임에 전혀 두려워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지나는 차를 가끔씩 한가로이 지켜볼 뿐이다. 이로 봐서 개의 이같은 행보는 하루이틀이 아닌 듯하다. 교차로 한쪽에는 그의 집으로 보이는 '가옥'이 있고 개는 한껏 여유롭다. 한 번 사는 삶, 사람 삶도 이처럼 여유롭고 배짱이 있다면 어떨까. '칠 테면 쳐 보아라, 난 흔들리지 않는다' 하는 배포도, 본인의 평정심 내지 정신건강을 고려해 볼 때, 때로는 필요할 듯도 싶다.
[와이뉴스]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364번지 위치하며 보살입상은 향토유적 제1호, 석불입상은 제15호이다. 아양동 아롱개 마을에서 마을 안녕을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미륵부처에게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아롱개마을 미륵고사라고 한다. 미륵부처는 보살입상과 석불입상 두 기인데,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부처를 미륵데기라고 부른다고. 아양동 석불입상은 보살입상 옆에 위치한 미륵불로, 화강암 1석으로 조각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 부위에는 관모처럼 두정에 표식이 있고 눈, 코, 입이 가지런하며 귀는 짧고 목에는 넓은 띠가 있다. 무릎 부위 하단부부터 매몰됐는데 현재의 높이는 260㎝, 어깨 폭은 79㎝의 규모이다. 석불입상 옆의 보살입상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젊은 장수가 도기리 탑산에서 뛰어 올라 얄미산을 딛고 비봉산 장수바위로 뛰어 가다가 실수로 여미륵(현 보살입상)의 목을 차서 부러뜨렸다고 한다. 이후 그 장수는 전쟁에서 사망했고 아양동 사람들에 의해 미륵의 머리는 복구되었다고. 원래의 위치는 현 위치에서 3미터 앞이라고 하며 일제 때 수해로 도괴되어 목 부분이 파손됐는데 마을민의 꿈에 미륵이 현몽하
[와이뉴스] 선돌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이뤄진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까지도 마을의 수호신 격으로 신성시 되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용인 사암리 선돌은 마을 입구 정동향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선돌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 제22호로 1990년 11월 22일 지정됐다. 선돌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 맞은편 밭(753-2번지) 가장자리였으나 2011-2012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이 지역은 '서돌뱅이'로 불리는데 이는 '선돌이 박혀 있는 곳'이는 뜻에서 연유했으며 '선돌박이'가 '선돌뱅이'로 변하였다고. 선돌은 '서 있는 돌'을 의미하고 '뱅이(박이, 백이)'는 터나 장소를 가리킨다. 암질이나 크기로 볼 때 원통형의 돌을 반으로 쪼개 놓은 모양이며,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돌의 크기는 대략 폭 1미터, 두께 0.3-0.4미터, 길이 2미터 이상의 것으로 논에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 선돌은 잘라낸 면이 거친 데 반해 청동기시대 선돌은 매끈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