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뉴스] 6·25 전쟁 중인 1951년 미국 군대가 매향리 앞 농섬을 해상 표적으로 삼고 사격 연습을 했고, 1954년 미국 군대가 매향리 해안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해당 농지는 주한 미군 요청에 따라 국방부가 1968년 징발한 것이며, 1980년 해안 지역의 농지를 추가 징발하면서 719만평 규모의 미국 공군 훈련소가 조성됐다. 사격 훈련과 폭격 훈련이 54년 동안 이어지면서, 소음 및 환경 공해, 오발 불발탄 등으로 인근 주민들이 상해 사망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2000년 8월 국방부가 ‘매향리 사태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지상화기 사격 훈련이 전면 중지됐고, 주민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2001년 4월 1억 3천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으며, 8월에는 주민 2천371명이 추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3월 주민 14명에 국가 배상이 확정됐고, 이후 주민 1천899명에 2차 손해배상 소송에도 81억 원의 배상 판결을 받으면서 쿠니사격장 폐쇄가 결정됐다. 2005년 8월 주민들의 노력으로 사격장을 폐쇄했다. 아픈 역사를 보존하고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 목적으로 2021년 9월 공원으로 재단장했다. 쿠
[와이뉴스] 최근 김건희 여사 특검 찬성 여론이 높고, 이에 대통령실은 김건희 여사의 일정 등을 전담 관리할 제2부속실 설치 검토를 밝혔다고 전해진다. 김 여사를 둘러싼 여러 잡음과 논란을 해명하고 속 시원히 밝히려면 특검을 수용하는 것도 한 방안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진영을 떠나, 대승적 차원에서, 선거를 앞두고 상대편의 잘못을 파헤치는 이른바 '네 흠이 더 크다' 식의 전략보다는 자당의 정책이 국민 삶의 고양을 위해 더 효율적이라는 어필을 보고 싶은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은 6일 오전 수원시 영통구 한 도로변의 펼침막이다.
[와이뉴스] 십자화과에 속하는 2년생 초본식물로, 학명은 Brassica napus L.. 배추와 양배추의 자연교잡종으로 노란색 꽃이 피며 종자는 기름으로 많이 쓰여 이름이 油菜(유채)라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시베리아, 코카서스 지방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로 추정되며 우리 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명나라로 추정한다고. 전국에서 볼 수 있지만 제주의 넓은 유채밭이 특히 유명하며 평균적으로 3-4월 개화이나, 제주의 경우는 2월부터 개화하는 경우가 있어 이른 꽃놀이 하는 관광객들에게 명소라고. 2023년을 보내는 12월의 마지막에, 앞으로 남은 겨울이 두렵지 않은 듯 제주 들판 한편을 유채꽃이 수놓았다.
[와이뉴스] 팔달산에서 돌을 뜬 흔적이 남은 유적이다. 바위 군데군데에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남아 있다. 화성 축성공사 당시 석재를 성곽에서 3-7리 거리의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에서 돌을 떠와 다음어 사용했다. 팔달산에서만 1만 3천 덩어리가 채취되었다고 한다. 정을 사용해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에 의해 돌이 갈라진다. 채석장에서 크기별로 다음은 석재를 거중기로 들어올려 수레에 싣고 축성현장까지 운반했다. 능률을 올리기 위해 관청은 미리 정해 놓은 석재 규격에 따라 값을 매겨놓고 떠온 돌에 그만큼의 값을 쳐주었다. -자료참조: 수원시 등 ※ 촬영: 2023.12.03.
[와이뉴스] 안성군청은 안성시 혜산로 13번지 옛 관아터에서 시작해 낙원길 95번지 건물(현 안성1동 주민센터)을 지어 청사로 사용했다. 구 군청사는 1928년 10월 준공됐다고 전해지며, 2018년 3월 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09호로 등재됐다. 일제강점기 안성 일대 평야 경작 작업과 소출 관리를 위해 들어섰다고. 1966년 안성군청사의 신축 이전으로 ‘옛 안성군청’은 안성읍사무소로 사용하다 1998년 4월 1일 안성시 승격으로 ‘안성1동사무소’로 전환됐다고 전한다. 조적(벽돌쌓기) 기법 등을 사용한 건축적 특징과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건립된 관공서 건물 가운데 남아있는 사례가 적어 희소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자료참조: 경기도사이버도서관, 안성시 등 ※ 촬영: 2023.12.18.
[와이뉴스] 이 녀석은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상세히는 오른쪽 뒤편 발 부위가 잘려 없다. 둘이 다니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분분히 제 구역을 돌아다니고 이 높다란 담장도 풀떡 뛰어오르며, 나무에 코를 가져다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또 이렇게 디바이스를 들이대는 인간에게 슬쩍 얼굴도 보여준다. 씩씩한 고양이다. 사진은 22일 오후 안성시 공도읍 한 아파트 단지에서 촬영됐다.
[와이뉴스] 조선전기에 창건된 교육시설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1291년 당시 수원의 읍 중심이었던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화산 앞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전체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이며 대성전과 명륜당이 일축선 상에 놓여 있다. 1789년 읍치를 이건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 건축했다. 이전 당시 급히 서두른 탓에 목재 대부분을 구건물의 것을 재활용했다. 건물 하부가 물에 잠겨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했고, 1795년 재건축했다. 1959년 대성전과 명륜당 보수, 1978년 대성전과 외삼문(外三門) 보수, 1979년 사무실과 수복청(守僕廳)*을 신축했다. 1980년에는 담장을 쌓았고 1983년 유림회관을 증축했다. 수원향교의 대성전은 경기도 내 향교 대성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또 목공사를 맡은 목수를 특정할 수 있고, 이 목수가 지은 다른 사례와 비교를 통해 목수의 기법과 구조, 세부
[와이뉴스] 대한민국 1세대 서양화가 장욱진 선생(1917-1990)이 1986-1990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펼친 곳으로, 용인 기흥 마북동 위치하며 국가등록문화제 제404호다. 장욱진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초기에는 서양의 모더니즘 양식을 수용했으나 1950년대 말부터 가족,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동양적이고 수수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그의 그림은 표현이 세련되고 조형적 구성이 치밀하다고 평가 받는다. 장욱진 가옥은 한옥 2동과 양옥 1동으로 구성된다. 한옥은 1884년 지어진 초가였는데 장욱진 선생이 1986년 기와집으로 개량해 화실 등으로 사용했다. 양옥은 1953년 그의 작품 <자동차가 있는 풍경>의 벽돌집을 본 떠 직접 설계하고 1989년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선생의 서랑(壻郞)인 김익성 이사(장욱진미술문화재단)에 따르면, 생전에 선생은 그림에 몰두하는 삶을 살았으며 경봉 스님(수덕사)에 의하면 "전생에 도(道)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료참조: 경기문화재단, 재단법인 장욱진미술문화재단 등 ※ 촬영: 2023.12.10.
[와이뉴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로 불린다. 수원시립도서관 동쪽 구릉에 모두 화강암으로 이뤄진 4기의 바둑판식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1·2호 고인돌은 7미터 거리를 두고 비교적 낮은 구릉의 평지에 있다. 이곳에서 팔달산 정상 화성 쪽을 향해 50미터 정도 올라가면 왼편으로 3·4호 고인돌이 있다. 이곳에 분포된 4기의 지석묘는 대체로 구릉의 높은 쪽인 북쪽에는 지석을 받치지 않고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했으며 상석은 크기가 작고 두께가 두꺼운 편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구축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뒤, 지석을 배치하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기반식지석묘(碁盤式支石墓)일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사항은 정식 발굴조사 후에야 확인 가능하다고. 이들 지석묘군은 경기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한강 유역의 선사문화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규모 4기 1호 덮개돌 134×108×55cm 2호 덮개돌 180×165×45cm, 받침돌 20×110cm 3호 석재(받침돌추정) 118×216cm 4호 덮개돌 90×96×50cm -자료참조: 경기문화재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문화재단 등 ※ 촬영: 2023.12.0
[와이뉴스] 박두진(朴斗鎭 1916-1998)은 1916년 3월 10일 안성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부터 60년 동안 20여 권의 시집을 펴내며 1천여 편의 시와 400편이 넘는 산문을 발표했다. 박두진은 안성 보개면 동신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안성을 떠날 때까지 박두진이 안성에서 살던 20여 년은 박두진의 문학적 상상력과 정서를 길러주었다고 평가된다. 박두진문학관은 안성 출신 박두진 시인의 삶과 문학적 발자취를 조명하고, 문학을 매개로 시민들과 소통, 공감하는 문화공간을 조성하고자 건립됐으며 2018년 11월 16일에 개관했다. 안성맞춤랜드 북쪽 자락 10,512㎡ 부지에 옥상을 포함한 지상 3개 층 총면적 999.45㎡ 규모로 건립됐다. 박두진 유족이 기증한 2천여 점의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건립됐다. 상설 전시실, 기획전시실, 북카페, 수장고 등으로 구성된다. -자료참조: 한국문학관협회, 문화관광해설사 통합예약 등 ※ 촬영: 2023.09.18.-10.08.
[와이뉴스] 국가등록문화재다. 지정일은 2018년 3월 9일이며 (재)수원교구유지재단이 관리한다. 공소란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신자들의 모임 장소다. 고초골 공소는 천주교 수원 교구 내 한옥 공소 중 가장 오래됐다. 고초골은 1820년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고종3년 병인박해(1866)로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이 붙잡혀 순교했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당시 고초골 교우촌에 살던 교우 세대 수와 총인원이 알려지지는 않지만 한 마을을 형성했다는 점과 예전 가족 수를 고려하면, 고초골의 순교자 수가 수십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해진다. 고종 23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수호통상조약(1886)이 체결돼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기도 및 집회 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했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891년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문촌리 안기선 전 천안군수 자택에서 누에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신자 수가 증가한 1910년대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소 건물은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피정(避
[와이뉴스] 박문수는 조선 후기 영남별견어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경기도관찰사 임명, 평안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91년 9월 8일 외가인 경기도 평택시 진위현에서 박항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 고령 박씨, 외가 경주 이씨, 처가 청풍 김씨다. 부친 박항한은 박문수가 여덟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조부 박선과 백부 박태한은 이 두 해 전에 세상을 떠나 박문수는 자연스레 외가 쪽의 지원에 의해 성장한다. 박문수가 유일하게 암행을 한 것은 1727년 영남별견어사 때로, 박문수가 암행어사 직을 수행한 기간은 실제 1년도 채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공주 향리 생활로 백성들 어려움을 잘 알아 인사, 세정, 군정, 형정 등에 여러 개선안을 냈다. 왕족들이 미개간지를 선점해 수조권을 행사하는 절수(折收) 개혁도 과감히 진언했다. 별견어사 업무지침은 “수시로 암행하여 민간의 어려움을 탐문하되, 불법 수령은 파직시켜 각 읍을 숙연하게 하라”였고, 이에 따라 박문수는 철저한 염찰 업무를 수행해 수령 41명을 조사해 13명의 파직을 이끌었다고. 박문수가 극심한 흉년에 시다리는 마을에 어사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와이뉴스] 1970년 실향민 김해근(법명 해곡 삼장법사)이 부처의 공덕으로 민족 화합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 사찰이다. 140여 개 국가와 교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열반종의 총본산으로 대한불교열반종 총무원이 와우정사 내에 있고, 전국 70여 개의 말사가 있다고. 세계만불전 건립을 위해 각국에서 불상을 수집하고 있으며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전신사리와 불교 초기 팔리어 경전과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봉안돼 있다. 또 인도에서 가져온 향나무로 만든 누워 있는 길이 12m, 높이 3m의 열반상(와불상: 누워 있는 불상)이 봉안돼 있어 와불전이라고도 한다. 이는 세계 최대의 나무부처 상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전한다. -자료참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두산백과 ※ 촬영: 20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