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뉴스] 만석거(萬石渠 저수지)는 수원시 북문 밖 공설운동장 북쪽에 위치한다. 원래 둘레 1.28km 규모로 수구, 수갑 등의 당대 최신 기술이 반영된 수리시설이었다. 1795년(정조 19) 축조됐으며 현대에도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6년 12월 26일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됐다. 1997년 만석공원 조성으로 저수지의 일부가 매립돼 원래 규모보다는 축소됐다. 1794년 극심한 가뭄으로 정조는 농업개혁을 위한 혁신사업으로 수리시설 조성을 명했다. 1795년 윤2월 장안문 북쪽 황무지를 개간해 국영농장 둔전을 만들고 농업용수를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는 만석거 조성을 하게 된다. 축조 당시 연꽃을 심었으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남쪽 언덕에 영화정을 세웠다고 한다. 조기정방죽, 조귀정방죽, 조개정방죽, 일왕저수지, 북지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현재는 만석공원으로 시민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공원은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 시민공원으로 만석거를 중심으로 한다. 분수대, 휴게 시설, 다목적 운동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축구장 등의 스포츠 공간, 야외음악당, 수원시립미술전시관 등이 있다. -자료참조: 지지씨, 경기도메모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와이뉴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1981년 7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됐다. 해발 24m 낮은 구릉 정상부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고 있는 평지성으로 평면 형태가 긴 사각형 모양이고, 성벽 중간 지점이 약간 돌출돼 있다. 성의 둘레는 337m이며 성벽 중심부 남북 길이는 116m, 동서 길이 81m, 내부 면적은 5,964㎡다. 축성 시기 관련해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삼국시대 축성설은 도적이 심해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과 신선 도승(道僧)이 거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해온다고. 통일신라시대 축성설은 당나라 말기 한림학사 임팔급*이 간신의 참모를 당해 이를 피하고자 팽성으로 망명해 농성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견해다. 고려시대 축성설은 고려시대에 토성이 많이 축조된 점, 인근 처인성과 농성의 축성법 및 입지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고. 조선시대 축성설은 임진왜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다. 2003년 조사 결과 동문지와 외황 하층에서 고려시대 토기와 기와, 분청사기 등이 출토돼 농성의 고려시대 축성설이 힘을 얻고 있다. 평지에 만든 성이지만 평상시에는 이용하지 않고 유사시 주
[와이뉴스] 금광면 신양복리 복거(福巨) 마을의 옛 지명은 복호리(伏虎里)였다. 뒷산의 형세가 호랑이가 엎드려 앉은 형세라 하여 호동(虎洞)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복거리로 불렸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풍요로움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중심의 느티나무는 수령 400년이 넘는 보호수로 오랜 마을 역사를 말해주고, 가을이면 감나무 홍시가 시골 정취를 자아낸다. 안성시와 두리마을운영위원회가 주최하고 대안미술공간 소나무가 시행한 '아름다운 미술마을 만들기'는 행정안전부 '살기좋은 지역 만들기(2007-2009)'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행됐다. 꾸미기 주제는 마을 유래와 여유로운 삶에의 소망을 담아 '호랑이를 기다리며'로 하고 민화를 통해 소박함, 예술성 등을 마을 주민과 예술가, 지역 대학들과 협업으로 표현했다. -자료참조: 안성시 등 ※ 촬영: 2024.03.11.
[와이뉴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고속도로 무인수납 영업소 현황(2023.7)은 전국 164개소에 달한다. 강원 23개소, 광주전남 24개소, 대구경북 21개소, 대전총남 23개소, 부산경남 16개소, 수도권 25개소, 전북 14개소, 충북 18개소 등이다. 교통카드 기능이 탑재된 신용카드로 정산하는 경우, 노인이나 장애인 등이 일부 불편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도로공사의 인원감축에 따라, 2012년부터 무인정산 시스템으로 전환한 결과라고 전해지는데, '사람'은 없고 '기계만'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실패'가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와이뉴스] 남양교회에서 파견된 김응태의 전도를 받은 정창하 등이 1905년 3월 10일 예배를 본 것을 계기로 창건됐다.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고 1918년 동석기가 남양교회에 부임해 제암구역이 독립되면서 수촌교회는 제암교회와 같은 구역에 소속됐다. 제암교회와 함께 1919년 3·1운동 기간 중 일제에 피해를 당한 대표적 교회로, 1919년 4월 일제에 의해 교인이 학살되고 교당이 전소됐다. 당시 소실된 수촌교회 위치는 현재 교회 앞에 있는 개인주택 터로 추정된다. 1919년 전도사 김교철은 수촌교회 출신으로, 기독교인 안종후 홍원식과 협의 후 4월 3-4일 수촌리 교인과 주민을 인솔해 깃발을 앞세우고 장안면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가 수촌리 청년들이라고 생각한 일제는 4월 15일 새벽 보복에 나서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를 전소시켰고 많은 주민이 총검에 희생됐다. 또 수인이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고, 옥고를 치렀다. 방화로 전소된 예배당은 1922년 4월 아펜젤러와 노블의 지원을 받아 초가 8칸으로 신축됐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1953년 3월 목조 예배당(20평)을 신축했고 1965년 6월 창립
[와이뉴스] 제암교회는 1905년 8월 5일 아펜젤러에게 전도 받은 안종후가 자신의 집에서 예배모임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31일 제암리 인근 발안 장터에서 약 1천 명이 모여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했다. 4월 1일 밤에는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됐고 3.1운동 보복 행위가 시작됐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몇몇 마을 사람만 발안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 강연이 있다며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도록 강제했다. 이어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총칼로 학살한 뒤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5시간가량 타올랐다고 한다. 뛰쳐나오거나 달아나는 사람들을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됐다. 일본군경의 방화로 민가 31호가 불탔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
[와이뉴스] 3.1운동은 1918년 말부터 준비됐다. 민족대표 33인은 고종황제의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인파가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해 3월 1일 정오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인쇄물 배포 및 만세운동을 펴기로 했다. 평택시 각지에서도 3월 9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현덕면 기산리 황산리 도대리 방축리, 진위면, 북면 봉남리, 오성면 길음리 죽리 교포리, 팽성, 평택역 앞, 서탄면 금암리, 고덕면 두릉리 등 4월 10일까지 최대 3천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새벽 2시까지 역 앞에서, 뒷산에서 봉화를 들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제 군경의 무차별 발포 및 사격으로 사망하거나 현장 체포 및 징역형, 태90대 등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평택지역 만세운동 주도자의 직업은 농민 또는 학생이 대다수였다. 평택 화성 안성 지역의 만세운동은 다발적으로 전개됐으며 주재소나 관공서 습격 등으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주둔하게 됐고 화성의 경우 잔인한 보복 학살이 제암리교회(4.15)에서 일어나게 된다. 소중한 자유다. 사진은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기념비다. -자료참조: 평택시 등 ※ 촬영: 20
[와이뉴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가장 극렬하게 만세항쟁을 펼쳐 일제식민통치기관을 완전히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이룩한 안성4.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집결지였던 만세고개 일원에 건립한 기념관이다. 안성지역 만세운동과 관련한 유물 기록들이 전시돼 있으며, 독립운동의 역사적 자료를 실물 전시, 모형, 체험관, 영상물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횃불 모양의 무궁화동산, 국기게양대, 전시관, 광복사, 만세고개 기념비, 태극과 4괘로 구성된 안성3.1운동 기념탑, 체험교육실 등이 있다. 만세고개 기념비는 원곡면 만세운동 참여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으로, 원래는 성은고개였으나, 안성의 독립정신과 역사를 기리기 위해 1991년 건설부 고시에 의거 '만세고개'로 개칭하고 기념비를 건립했다. 국기게양대는 안성3·1운동기념관 개관 15주년을 맞이해 해발고도 145m에 안성 3·1운동의 의미를 담아 높이 31m, 총 176m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게 세워졌다. 광복사에는 안성지역 독립운동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현재 316명(순국선열 31위, 애국지사 284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자료참조: 경기문화재단
[와이뉴스] 앞선 4일 봄의 길목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어제부터 내린 비와 눈으로 22일 오전 7시 기준 수도권에는 대설 특보가 발효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인천 강릉 등 눈이 내리고 있으며, 오는 주말 기압골*의 영향으로 전국이 대체로 흐리고 아침 기온 -5~4도, 낮기온 3~11도로 예상된다. *기압골: 고기압과 고기압 사이의 저기압 구역.
[와이뉴스]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자연석이나 자연석을 일부 다듬어 세워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선바위 장사바위 마모바위 삿갓바위 입석 입암 등으로 불렸으며 '돌을 세웠거나 서 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은 벽사* 또는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마을 수호 기능을 갖는다. 또 논밭이나 이를 내려다 보는 얕은 구릉의 선돌은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경계와 이정표 기능도 지닌다고. 창리 선돌은 진위천 샛강 완장천 동편 구릉에 위치하며 정면으로 완장천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연월 1985년 6월 28일이며, 높이 2.1미터 너비 0.8미터 두께 0.3미터로, 전체 모습은 긴 검을 거꾸로 세워 놓은 형상으로 재질은 응회암이다. 옆면 가장자리는 손질한 자취가 남았다. 긴 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으로 '검바위'라 불렀으며 예부터 이 선돌이 쓰러지면 마을에 재앙이 인다는 설화가 있다. 이로써 선돌이 민간 신앙 대상으로 신성시 됐음을 짐작게 한다고. 옛날 선돌 옆에 또 다른 선돌 1기가 세워져 있었으나 도난당하였다고 전한다. *벽사(辟邪): 재앙을 막고 액(
[와이뉴스] 좋은 생각, 유산소 운동, 과일 채소 등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자는 건데, 일단 지나친 완벽주의 지양, 합리적 생각, 거절 능력 배양, 사소한 일에서라도 성공 가능성 높은 것 먼저 추진 등이다. 건강한 생활 유지를 위해 복식호흡과 명상, 취미 갖기, 가벼운 체조 등이 필요하다. 심뇌혈관질환 예방관리를 위해서는 금연, 절주, 적절한 운동과 체중 허리둘레, 정기적 혈압 혈당 측정 등을 해야 한다. 이 외에 숙면, 심호흡, 규칙적인 휴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진은 안성시 안성맞춤가족공원 내 건강 관리사항 표지판 모습이다.
[와이뉴스] 삼봉 정도전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는 정도전의 후손 봉화 정씨 가문의 집성촌이 있다. 정도전은 왕권국가를 지향했던 당시 정권과 대립해 운명을 달리했고, 후손들이 은사리에 터전을 꾸렸다. 기념관에는 정도전의 위패를 봉안한 문헌사, 장남 정진의 사당 희절사, 삼봉기념관, 삼봉문학관 등이 있다. 삼봉기념관에는 정도전 영정, 삼봉집목판, 도성도, 어록 등이 전시돼 있다. 삼봉집목판(재질:배나무)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을 인쇄하기 위해 1791년(정조15) 경상감영에서 만들었다. 본래 14권, 228판으로 구성됐지만 복본 제작으로 삼봉기념관에 266판, 경기도박물관에 2판이 소장돼 있다고. 삼봉 정도전선생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당대에도 삼봉 선생은 호걸 가운데 호걸로 평가 받았지만 정조는 그의 문집을 다시 정리해주었으며 고종은 '유종공종' 편액과 '문헌' 시호를 내렸다. 또한 "삼봉 선생의 육체적 생명은 60을 넘기지 못했으나 정신적 생명은 왕조의 창업과 중흥, 왕조의 근대화 등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휘하고 있다"고 전한다. -자료참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기문화재단,
[와이뉴스]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1342-1398)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으며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고,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정치사상체계는 주자학 기반이지만, 이단을 일부 포용하는 민족의식적 성격을 띠었다고.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으나, 오랫동안 유배 유랑 생활을 보내며 곤궁에 시달렸다. 부계혈통은 향리의 후예로 아버지 때에 중앙 관료 벼슬을 했고,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 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으며,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이러한 혈통으로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에게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평을 받았다고. 1360년(공민왕9) 성균시에 합격, 2년 후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 · 전교주부(典校注簿) ·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했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