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기_어때] [78] 용인시_사암리 선돌

 

[와이뉴스] 선돌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이뤄진 유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까지도 마을의 수호신 격으로 신성시 되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용인 사암리 선돌은 마을 입구 정동향을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선돌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 제22호로 1990년 11월 22일 지정됐다.

 

 

선돌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 맞은편 밭(753-2번지) 가장자리였으나 2011-2012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이 지역은 '서돌뱅이'로 불리는데 이는 '선돌이 박혀 있는 곳'이는 뜻에서 연유했으며 '선돌박이'가 '선돌뱅이'로 변하였다고. 선돌은 '서 있는 돌'을 의미하고 '뱅이(박이, 백이)'는 터나 장소를 가리킨다.

 

 

암질이나 크기로 볼 때 원통형의 돌을 반으로 쪼개 놓은 모양이며,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돌의 크기는 대략 폭 1미터, 두께 0.3-0.4미터, 길이 2미터 이상의 것으로 논에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 선돌은 잘라낸 면이 거친 데 반해 청동기시대 선돌은 매끈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700미터 거리 고인돌로 추정되는 다수의 돌이 있으나 서로 연관짓기는 어렵다고.

 

 

현재의 선돌은 모두 정동향이지만 이는 최초 조사 당시 넘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률적으로 맞춘 것이라 원래 상태는 어떠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유적을 처음 조사한 용인문화원의 자료에 의하면 횡으로 열을 지었다고 되어 있어 처음부터 열로 늘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인돌이 집단을 이룬 경우는 많지만, 선돌이 3개 이상 나란히 배치된 사례는 매우 드문 편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숭배대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사암리 선돌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부잣집에서 탁발승을 구박했는데 중이 '이곳에 큰 돌 셋을 세우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 하기에 그 말을 따랐다가 망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한 어느 며느리가 남매를 데리고 집을 나와 서 있다 그대로 돌이 되었다는 설이다.

 

 

 

-자료 참조: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용인시 등
※ 촬영: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