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누가 그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갔나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촉구 국회 앞 농성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농성 118일째’
한 평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비닐과 합판 등으로 대강 얽어놓은 한쪽 벽면에는 농성 일자를 나타내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앞선 3월 4일이었다.

한쪽에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손팻말이 부착돼 있다. 혜화동에 가는 길에 가져온 것이라 한다. 바람에 팻말이 반쯤 접히자 최승우 씨가 무심한 듯 쓱 올바로 편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2017년 12월 7일부터 시작된 농성은 관련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 대표는 말했다.

한종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대표는 6년 전인 2012년 5월부터 일 년가량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었다. 그것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첫걸음이었다. 외롭고 고단한 나날이었다. 그 때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가 한 대표에게 글로써 이 이야기를 전하라고 제언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살아남은 아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피해 당사자로서의 최후의 수단이다.”
최승우(49) 씨가 말했다.

“생존자라는 의미는 짐승처럼 살아왔었던 방법들을 털어내고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는 뜻 같다.”
한종선 대표(42)가 말했다.

한 대표와 현재 연락이 닿고 있는 피해자 수는 240여 명이다.

유난히 길고도 추운 겨울이었다. 비닐 한 장으로 바깥 바람을 차단한 채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던 것일까. 최승우 씨는 끝내 지독한 몸살에 시달렸고 지난해 9월 시행한 부산 옛 형제복지원 터에서 청와대까지 486km에 이르는 국토대장정을 마친 후 한 대표는 허리 수술을 받았다. 대장정 당시부터 허리가 안 좋아 나무 지팡이와 보호대로 버티던 차였다.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社會福祉法人 兄弟福祉院)으로 1975~1987년까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당시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다.

3천146명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져 35명이 탈출해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됐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로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이 형제복지원의 성립 배경이다.

한종선 대표와 누이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됐으며 부친과 누이는 지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일이 해결되고 나면 누나 아버지와 함께 오순도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그다.

최승우 씨와 그의 동생은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끌려갔고 동생은 그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하늘이 세상에 자신을 보낸 뜻을 안다는 나이 지천명이 다 되도록 그들은 인생에서 꿈을 꿀 수도 꾸는 방법도 모른 채 살아왔다. 그런 그들은 느지막이 다시 삶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돌아오는 길 하늘에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갔는가.


/ 이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