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잊히지 못할 이야기 ‘형제복지원’



 

 


                              -   편집국장 이영주

“너희들은 죽어서 고깃값도 못 받는다.”
군대보다 더한 훈련과 엄청난 육체적 노동, 인권 유린에서 탈출해 잡혀온 원생에게 ‘인민재판’을 열고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은 말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잡혀온 아이들에게였다. 한종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대표는 형제복지원 시신매매 사실을 질의하자 이같이 전했다. 당시 중대장과 박 원장에게는 시신매매 정황에 신빙성을 주는 발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박 원장은 생전 원생들을 폭행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위와 같은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社會福祉法人 兄弟福祉院)으로 1975~1987년까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당시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다. 3천146명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져 35명이 탈출해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됐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로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이 형제복지원의 성립 배경이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 대표는 “그 곳에서 우리는 살인 병기처럼 조형됐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훈련을 받았으니 그런 셈이다”라고 말했다. 한 대표의 부친과 누이 등 가족 절반 이상이 형제복지원 피해를 입었다. 모친은 한 대표가 3세 때 돌아가셨고 큰 누이는 친척집을 전전했으며 그 둘을 제외한 부친, 누이, 한 대표는 모두 형제복지원에 수용됐으며 부친과 누이는 지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 대표에 따르면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하고 나서도 원생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오랜 수용 생활 후 빈털터리인 그들이 집을 찾아 가는 길에 추위와 굶주림에 객사(客死)한 경우가 허다했다. 통계청의 1983~1993년까지의 각 지역 사망자 수 통계를 보면 형제복지원 폐쇄 전인 1987년 전의 부산시 사망자 수는 인근 지역에 비해 적다. 폐쇄 후인 1987년 이후에는 부산시 사망자 수가 급격히 올라간다. 1992년부터 부산 사망자 수는 줄고 타 지역 사망자 수는 급등한다.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 후 경찰 등은 노숙인 집중 단속을 펼친다. 탈출자들은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의 도주를 하고 그 과정에서 객사는 빈번했다는 분석이다.

형제복지원 12년 동안 자체 기록으로는 513명 사망이지만 한종선 대표는 그보다 많은 이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 대표가 현재 형제복지원 관련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은 240여 명이다. 이들은 주로 기초생활수급자나 1일 근로자, 장애인 등으로 생활하고 있다.

형제복지지원재단은 처음 형제육아원에서 출발해 형제원 등으로 명칭을 수시로 변경하고 1987년 폐쇄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폐쇄가 아닌 ‘국민에게의 공포’를 확산함으로써 계속 존속하고 있다고 한 대표는 말한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그들이 왜 복지원에 끌려가야 했으며 ‘짐승처럼’ 살아야 했는지 철저한 진상 파악과 내무부훈령 제410호가 피해 원생들에게 미친 영향, 또 그들을 보듬어 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형제복지원 내에서의 처참한 인권 유린과 의과 대학 실습용으로의 시신 매매는 경찰 조사 결과 이미 밝혀졌다. 아울러 원 내 성폭행 등으로 출생한 아이의 외국으로의 인신 매매 정황 또한 피할 수 없다. 원생 탈출 방지를 위한 소대 안팎의 이중 잠금장치, 경비원과 경비견을 통한 외부 세계 차단 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복지원 운영 12년 동안 513명의 사망자가 공식 통계이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수치가 그보다 높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복지원은 연간 20억 원의 정부 예산을 지원 받아 운영됐다. 사찰 당국은 망원 렌즈를 이용한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고 2개월간의 내사 끝에 관계자들을 검거했다. 1989년 박인근 원장과 직원 5명을 구속하고 박 원장에게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 시절 복지원 관련 적절한 조치와 특별법 제정에 찬성했다고 전한다. 이들은 내각 구성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며 피해 생존자가 발언할 수 있는 시간 제공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청와대에 편지를 써서 보낼 계획도 갖고 있다.

형제복지원으로 수용된 이들은 ‘사회 거리 정화 사업’이라는 명분하에 강제로 끌려갔다.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수용된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복지원이 폐쇄된 후 2차 단속에 잡히지 않기 위해 타 도시로의 탈출을 감행했던 이들, 그 과정에서 빈곤과 추위로 객사한 이들의 원혼(冤魂)은 지금도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토록 짐승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