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장 이영주
[와이뉴스] 근래 ‘-린이’ 열풍이 불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은 본래 ‘어린이’에서 어근 중의 한 음절 ‘어’를 빼고 나머지 어근 ‘리’에 관형사형전성어미 ‘ㄴ’과 접사 ‘이’를 붙여 생성된 말이다. 주로 뭔가를 새로 시작한 대상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이를테면, 부동산 투자를 시작한 사람을 가리켜 ‘부린이’, 코인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코린이’의 식이다.
채식 열풍
위 열풍을 타고 시작되고 있는 것이 채식(vegetarianism 菜食)이다. 채식은 말 그대로 고기류를 피하고 주로 채소, 과일, 해초, 견과류 등의 식물성 식품을 섭취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종류도 다양하다. 채식을 하면서 닭과 같은 조류를 섭취하는 폴로, 어패류를 먹는 페스코, 달걀 우유 꿀 등 동물에서 나오는 물질을 섭취하는 락토오보, 유제품을 먹는 락토, 동물성 음식은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 이보다 더 엄격한 과일과 견과류 등만 먹는 프루테리언도 있고 화식(火食)을 전혀 하지 않는 생식 채식주의자도 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는 채식을 지향하지만 사정상 육류를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도 있다.
다양한 채식 동기
채식을 시작하는 동기 또한 다양하다. 가장 첫 번째로 꼽자면 건강상의 문제다. 지나친 육식으로 암, 당뇨, 고혈압, 심장발작 등의 질병에 시달리다 결국 채식을 시작하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사례는 주위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서 알레르기나 트라우마 등의 사유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종교적인 이유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라든지 힌두교, 자이나교, 마니교 등이 그 종교적인 방식으로 나름의 채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힌두교는 소고기를 섭취하지 않고 윤회설을 믿는 자이나교는 ‘모든 생물은 고통을 느끼며 고통을 매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생명을 최소한으로 해치는 범위에서만 식량을 구하도록 하고 있다고.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마니교 또한 금식이나 채식을 한다고 전해진다.
세 번째로는 환경적인 이유다. 미국의 경제·사회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육식의 종말>에서 서구 축산산업이 아메리카 대륙을 약탈해 토지를 황폐화하고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을 착취하며 목초, 비료, 제초제, 인공수정, 비육(살진 고기), 도축, 유통까지 수직계열화된 다국적기업이 돈을 벌 동안 지구환경이 어떻게 파괴되고, 또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느라 굶주리는지를 알려준다. 더불어서 지구상의 담수 또한 과잉 목축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네 번째 이유로는 동물권 보장이다. 동물권(動物權)이란 1970년대 후반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피터 싱어에 의해 주창된 개념으로 인권을 확장해 동물도 비인간동물도 인권에 견주는 생명권을 지니며 고통을 피하고 학대 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가진다는 개념이다.
종차별주의
여기에서 말하는 ‘동물’이란 사람과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물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소 돼지 염소 말 오리 거위 닭 등 모두 말이다. 흔히 생각하는 동물권하면 인간에게 친숙한 개, 고양이, 새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피터 싱어에 의하면 종차별주의이다. 그는 저서 <동물해방>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의식이 있는 존재인 동물을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하고 학대하는 것은 종차별주의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동물애호와는 무관하다고 짚었다. 동물의 권리 문제는 호불호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이라는 것.
비타민B12
어느 정도 채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여기까지 무사히(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읽으셨으리라 짐작된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채식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일단, 영양학적 관점에서 먼저 풀어보자. 채식에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일 것이다. 채식으로 내 몸에서 필요한 영양소 뭔가가 빠지지는 않을까,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말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논란을 낳고 있는 것은 비타민B12다. 비타민B12는 흔히 동물성 식품을 통해서만 섭취 가능하며 이 때문에 채식으로 빈혈, 근력 저하 등이 촉발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육식성 식사를 주로하는 서구인에게서 나타나는 우려일 것이다. 식물성 식사를 해왔던 농경사회인 동양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김, 파래, 다시마, 미역 등 해조류에 인체에서 활성화되는 비타민B12가 함유돼 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된장, 청국장, 고추장, 버섯류 등에도 함유돼 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약품으로도 섭취할 수 있다.
단백질
또 단백질 문제도 다수 제기된다. 채식을 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많이 듣는 말이 “단백질 섭취는 어떻게 하세요?”일 것이다. 단백질은 콩이나 두부, 현미 등으로 섭취 가능하다. 그걸로 될까 하겠지만 된다. 아니 충분하다. ‘무소유’로 유명한 승려이자 수필작가 법정 스님은 수필 ‘먹어서 죽는다’에서 “국민 건강이나 한국인의 전통적인 기질과 체질을 고려한다면 육식 위주의 식생활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의학박사 황성수 힐링스쿨 교장은 1991년부터 현미채식을 실천하며 그의 환자들에게도 현미채식을 권한 것으로 알려진다. 환자들은 그가 권하는 식이요법만으로 고질병인 당뇨와 고혈압을 완치한다. 음식이 곧 약이라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을 실현하는 셈이다.
문제는 잘못된 편식
문제는 채식이 아니라 잘못된 편식일 수 있다. 서양에서 채식을 하려 콩스테이크만 먹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례도 있다. 이는 극히 잘못된 채식의 예다. 채식은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죽여서 그 살점을 섭취하는 것이 아닌, 식물로 이뤄진 영양소를 ‘두루’ 섭취하는 것이다.
행복은 장(腸)에서
인간은 어디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가. 뇌일까? 바로 장(腸)이다. 일반적으로 장 상태는 건강의 척도를 보여준다. 아침마다 변의 상태를 보고 건강을 체크했던 조선시대 임금을 떠올려 보라. 일본의 소화기 질환 명의(名醫) 무라타 히로시 박사는 “장이 건강해야 우리 몸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장은 뇌와 함께 장 신경계와 뇌 중추신경이 연결축으로 이어져 인지와 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장 신경계는 5억개의 뉴런(neuron)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1억개의 뉴런으로 구성된 척수보다 5배 많은 수치라고 한다.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키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95%가 장에서 만들어진다. 또 장에는 체내 면역세포의 70%가 집중돼 있어 장이 건강하면 면역시스템이 활성화 돼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바로 장 건강을 지키는 올바른 식생활이라는 것.
남녀 차별의 상징, 육식
육식은 또 남녀 차별의 상징으로도 일컬어진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시의 종말>에서 이 점을 꼬집는다. 이에 따르면 붉은 피는 전통 문화에서 상속의 매개자로 간주되고 혈통은 사회적 계급 조직을 정하는 데 가장 편리한 방식이다. 영국 귀족들은 더욱 우수한 소를 사육하는 데 열중했으며 자신의 소 떼에서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육류에 의한 계층 조직은 사실상 모든 육식 문화권에 존재하며 성별로 사람들을 구분한다. 이런 점에서 육식 문화는 전통적인 식물 중심의 농경 사회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인류학자 페기 샌데이(Peggy Sanday)는 우연하게 동물 중심 경제는 남성 지배적인 데 비해 식물 중심 경제는 여성을 축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물 중심 경제는 남신(男神), 부계(父系)제, 사회적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남성이 포진하는 성별 계층 조직의 특징을 보인다.
미국의 사회 활동가 캐롤 애덤스(Carol J. Adams)는 저서 <육류의 성(性) 정치학>에서 고대의 음식과 성별의 선입관이 심리적 영역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를 밝힌다. 육류는 단순한 음식을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
리프킨은 또 책에서 남성들은 사회적 통제의 무기로서 여성들이 종속적인 지위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위한 수단으로서 오랫동안 육류를 이용해왔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인도네시아의 예를 드는데, ‘육류는 남성들의 재산으로 간주된다. 잔치에서는 (중략) 남성을 기준으로 가장들에게 고기가 분배된다 (중략) 따라서 분배시스템은 사회에서 남성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밝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남성 가장이 직업을 잃게 되면 ‘음식 섭취에서의 특권 역시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든다.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줄어들면 할당받는 고기의 양도 이에 비례해 줄어들었다고.
“채식은 인간 최소한의 도리”
국내 비건채식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전해진다. 여기까지도 별 거부감 없이(대부분 긍정하며) 글을 읽은 독자시라면, 아마도 채식을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이 한 문장을 완성하는 짧은 찰나에도) 동물들은 여전히 ‘사람에 의해’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다. 공장식 축산의 폐해는 환경오염, 기아, 동물학대 등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좋은 뜻을 갖고 시작한 채식일지라도 막상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난할지 모른다. 당신이 아프거나 간혹 컨디션 난조이거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를 모두 ‘채식 탓’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작하고 싶다면 이러한 ‘근거 없는 비판’과 비난을 모두 감수할 각오로 시작해야 한다. 초반의 명현현상(瞑眩現像)*만 잘 견뎌낸다면, 당신도 이제 지구를 위해, 같은 인류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동물들을 위해 실천하는 지구인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비건채식의 선두주자 월간 <비건>의 이향재 대표는 말했다. “채식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옳은 일이며 바른 삶을 사는 방식의 하나”라고.
*명현현상(瞑眩現象): 장기간에 걸쳐 나빠진 건강이 호전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반응. 근본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는 징후로 이 반응이 강할수록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