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장 이영주
[와이뉴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의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법률 제10호로 제정되었고 그 후 11차례에 걸쳐 개정이 있었다. 크게는 4.19혁명 이후 대폭 완화됐다가 5.16 이후에는 보다 강화된 반공법이 제정되기도 했으며, 1980년 반공법이 폐지되면서 다시 국가보안법의 형식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4장 25개의 조문과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제1장인 총칙에는 국가보안법의 목적을 밝히고(제1조), 이 법에서 말하는 “반국가단체”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제2조). 제2장은 죄와 형에 관한 것으로서 제3조부터 제17조까지다. 제3장은 국가보안법적용법률에 관한 형사소송의 특칙을 규정하고(제18조-제20조), 제4장은 보상과 원호에 관한 것으로 제21조 이하에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법 제1조에서 밝히는 바처럼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많은 폐지 목소리가 일어 왔다.
고 노무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은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 등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전해지며 당시(2004)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법안을 제출했는데 그 논거로는 “국가보안법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해 왔으며 북한과의 관계에서 교류협력 등에 장애요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형법상 간첩죄(제98조)와 내란죄(제87조) 개정안을 제시했다. 다만, 이 경우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분학과의 관련성을 여러 양태로 나눠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의 핵심인데,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볼 근거가 없어지게 되며, 또한 북한이 과연 내란목적단체로 해석될 수 있을지 여부가 문제된다는 우려가 제시됐다.**
그럼에도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여러 시민단체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행동’은 앞서 6월 12일 헌법재판소 앞 1인시위 150회를 진행하고 있다고 SNS를 통해 밝혔다. “국가보안법은 위헌”이라는 것.
‘국가보안법 7조부터폐지운동 시민연대’ 또한 “우리 헌법에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은)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국가가 임의로 그 목적을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라며 “위헌”이라고 주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찬양·고무에 관한 내용으로, 제1조는 “국가의 존립ㆍ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ㆍ고무ㆍ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ㆍ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한다. 이를 두고 “국가보안법 제7조는 일반 형법에는 없는 조항이다. 국가안보를 형법의 3대 법익의 하나로 삼고 있음에도 현행 형법은 국가보안법 제7조의 찬양·고무죄를 두지 않은 이유는 이 법의 악법성을 그만큼 징표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인다. 더불어 “법 제7조 제1항에 쓰인 ‘찬양·고무’, ‘동조’, ‘구성원’, ‘활동’ 등의 용어가 지나치게 다의적이고 그 적용범위가 광범위하다”고 짚는다.**
한 지역정치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사례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언제든 불거질 수 있고 언제든 정권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 일들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우려스럽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이 존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언제든 우발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국가보안법은 좌우익 간 극도의 혼란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시적 성격의 법률이었고, 또 국가보안법 폐지를 전제로 제정되었던 형법이 공포·시행된 지도 이미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울러 변화하는 세계정세는 물론, 무엇보다 국가의 주인(主人)인 국민(國民)이 해당 법률이 ‘위헌’임을 주장하며 폐지를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면 국가는 이들 목소리에도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
*(재)여의도연구소, “국가보안법 폐지 무엇이 문제인가”, 2004.
**허일태, “국가보안법 폐지의 정당성”, 「형사정책」 제16권 제1호, 2004.
***여수·순천 사건: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이후,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를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10월 17일 이른바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다. 그러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려 했으나, 이들은 정부의 증파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했다. 정부는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모든 지역의 상황을 정리했으나,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를 여수·순천 사건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숙군(肅軍) 조치를 단행했다.(우리역사넷, 여수·순천 사건,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