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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잃어버린 시간 짓밟힌 인권
기사입력 2017-07-31 09:15:24 | 최종수정 2017-07-31 09:16:22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임영택 씨

소대 내 동성 성폭행 빈번히 자행
여성 수용원 강간으로 임신하면 아이는 외국 입양
이불 덮여 수 시간 맞다 끌려 나가 ‘귀가’면 ‘죽음’
시체실 관 위치 바뀌어 시체 매매 추정
11살 잠시 길 잃고 5시간 만에 형제복지원행
배상보다 절실히 원하는 것은 진심어린 사과


“소대장이 원하는 소대원에게 자기 근처 침대를 배정해요. 주로 자는 시간 소대 내에서 자행 되죠. 소대를 옮기기 전까지 지속적으로요. 소대원들이 보거나 듣더라도 누구도 말을 할 수는 없어요. 당한 저도 말을 못하는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임영택 씨는 가장 끔찍한 경험을 묻자 원 내에서 자행됐던 동성 성폭행을 예로 들었다. 그의 부친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들을 찾아 헤매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재가했으며 형제들은 그의 연락을 꺼린다고 했다. 임 씨는 복지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지 못해 자해를 하곤 했다. 자신의 인권과 신체는 무참히 짓밟히고 침범 당했지만 다른 사람은 상하게 할 수 없어서다.
30일 서울 개봉역 인근 찻집에서 임영택 씨를 만나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들었다.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임영택 씨. 11살 때 이사 간 부산에서 잠시 길을 잃고 5시간 만에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됐다. 부친은 갑자기 사라진 임 씨를 찾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영택 씨가 원하는 것은 국가로부터의 공식 사과다.

형제복지원은 1975~1987년까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당시 주소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다. 3천146명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이에 35명이 탈출해 인권유린이 세상에 드러났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것이 형제복지원 설립의 배경이다.

“자고 있으면 찾아 와요. 주로 소대 안에서 여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대상이었죠. 동성 성폭행은 빈번히 자행됐으며 저 또한 당했어요. 무차별한 폭행으로 반항은 불가능해요.”
임영택 씨가 찬찬한 목소리로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소대장은 20~30대고 소대원들은 10대니 저항은 힘들다. 소대장의 책상과 침대는 소대 입구 앞에 위치한다. 소대장은 원하는 소대원을 자신의 옆으로 자리를 배정하고 자신을 상대하게 했다. 다른 소대원들이 자고 있을 때 소대 내에서 자행되는 일이었다. 누구도 반항하거나 저항할 수는 없다. 그러는 순간 모든 사람이 기합을 받아야 하고 말한 사람은 순식간에 매도된다. 저항하면 사람들 보는 데서 이불을 덮어 발로 밟는 폭행에 매일 시달려야 했다. 소대 내에서 소대원끼리의 소통도 절대 불가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발각될 경우 무차별적인 폭행이 어김없이 시행된다. 하루 24시간 내내 소대원과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철저한 감시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었다.

여성은 사무실로 불러 강간(强姦)했다. 비교적 외모가 준수한 이들은 새벽에 강간을 당했고 입소 몇 개월이 지나면 배가 불러 있었다. 여성들은 여성 소대에서 별도로 생활했으며 일반 남성 소대원과의 접촉은 불가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1~2달은 어머니 옆에 있게 하고 후에 미국 쪽으로 입양을 보냈다. 어린이들의 입양도 있었다. 복지원 관계자가 10~12세 아이들을 짚어 복지원 입구 큰 철문 부근에 일렬로 서게 했다. 그 사이로 한 대의 차가 들어왔고 차에는 외국인이 매번 타고 있었다. 외국인은 아이들을 선별해 데려갔고 남자 아이들도 포함됐다. 임영택 씨도 미국으로 입양을 갈 뻔했다. 임 씨는 이들이 미국으로 입양을 가는 것이 아닌 인신매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호적상 주소가 형제복지원이 아닌 이들은 입양 대상에서 제외됐던 것을 근거로 삼는다.

시체 매매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지나던 시체실의 관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매매를 추정할 수 있었다. 복지원 내에는 A B C동의 정신 병원이 있었다. C동은 형제복지원 관할이었고 A B동은 민간에서 내는 병원비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임영택 씨는 이곳을 다니면서 시체실을 지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으나 차츰 보게 된 시체실은 항상 불이 꺼져 있고 사람들도 드나들지 않았다. 밖에서 창을 통해 본 내부는 관들이 놓여 있고 그것들의 위치가 바뀌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반듯하게 몇 개의 관이 쌓여 있고 어떤 날은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없었다. 아마도 거기에 시신을 담아 내지 않았을까 임 씨는 추측한다.

임영택 씨는 11살 때 경남 김해에서 부산으로 이사 간 첫 날 잠시 길을 잃고 5시간 만에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어른들이 이삿짐을 정리하는 사이 골목을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고 어렵사리 파출소로 들어가 집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기다리라는 말에 잠이 든 임 씨를 깨워 차에 태운 것은 자정 즈음이었다. 집에 갈 수 있다며 태운 차는 형제복지원으로 향했다. 임 씨는 복지원에 간 뒤 나중에야 자신이 끌려간 시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수용원을 싣는 차량이 주기적으로 그 시간대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임 씨가 복지원에 수용된 건 1981년도로 그 당시에는 복지원 건물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던 터라 수용원들은 흙을 나르고 벽돌을 찍는 강제노역에 복무해야만 했다. 1만 5천여 평 2층으로 구성된 복지원은 거대했다. 최고 3천 600명을 수용할 규모였다. 복지원 완성을 위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심하게 맞았다. 맞다가 불구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폭행 후 상처 치료는 없었다. 머리에서 피가 나고 혼수상태가 되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이 맞아 기절을 하면 다른 곳으로 데리고 나갔다. 끌려 나간 후 소대원 인원 표시난에 ‘귀가’로 적히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활동하던 사람이 ‘심신미약’ 등의 사인(死因)으로 적혀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

복지원 체계는 원장 총무 사무장 중대장 소대장 서무 조장으로 구성됐다. 사무장까지를 제외하고 중대장 소대장 서무 조장은 모두 수용원 가운데서 원장이 뽑았다. 수용 후 2~3년이 지난 이 가운데 탈출할 생각이 없고 복지원 생활에 성실한 이들이 선출됐다. 추후 문제 발생 시 수용원끼리의 분란이었다고 발뺌하기 좋은 구실이었다고 임 씨는 짐작한다.

복지원은 최고 3천여 수용원이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영아 유아 여성 남성 소대로 분류됐다. 한 소대는 60~80명이며 20명씩 3~4개조로 구성된다. 소녀들은 영아 소대에서 아기들을 돌봤다.
소대 내부는 2층 철제 침대가 양쪽 일렬로 늘어서 있고 끝 쪽에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었다. 중앙에는 소대장이 지휘하는 공간이 있었고 문은 철장이 쳐져 있었으며 이중으로 돼 안에서는 소대장이 잠그고 밖에서는 중대장이 잠갔다. 창문에도 철장이 쳐져 있었다. 자해 방지를 위해 쇠붙이는 일절 반입이 금지됐고 침대 사이에는 10cm 정도의 틈이 있었다.
공식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였으며 스피커에서 교회 방송이 흘러 나왔다. 방송을 통해 예배를 했다.

곰팡이가 핀 썩은 김치를 물에 씻어 주고 시장에서 버리는 야채를 주워와 조리한 음식이 나왔다. 그마저도 소대장 기분이 언짢은 날 선착순 명수를 지정하면 한 술 뜨는 둥하고 바로 뛰어 나가야 했다. 엄청난 기합이나 폭행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소대장 심기를 거스르면 한두 시간을 끝없이 맞았다. 곡괭이 자루에 물을 묻혀 소대원들이 돌아가면서 같은 소대원들을 때렸다. 소대장의 명령이니 거부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강도를 약하게 하면 도리어 소대장에게 두들겨 맞았다.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대원들끼리 얘기를 나눌 수 없는 구조였고 몇 명이 모의를 했다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폭로돼 구타를 당했다. 아무도 모르는 내부 고발자가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의복은 형제복지원 마크가 인쇄된 트레이닝복과 양말이 전부였다.

임 씨가 풀려난 것은 1987년 복지원 폐쇄 몇 달 전이었다. 그 즈음에는 책임 회피를 위해 관리가 소홀했고 그 틈을 타 도망쳤다. 나오고 두 달 만에 복지원은 폐쇄됐다.
탈출 후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문을 팔아 하루 몇 천원의 수익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수용 당시 정자세로 앉은 채 몇 시간을 버텨야 하는 기합을 수도 없이 받은 탓에 계속 앉아서 하는 일이나 오랜 시간 안에서 하는 일은 하기 힘들다.

탈출 후 3~4년 만에 가족을 다시 만났다. 부산 서면 도로에서 신문을 팔고 있었는데 지나던 택시 기사가 임 씨 부친의 성함을 물었다. 임 씨의 부친이 버스 운전할 당시 친구였다. 그 덕분으로 가족을 찾았지만 임 씨는 가족을 찾은 게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행방불명된 임 씨를 찾으러 부친은 직업을 포기하고 수년 동안 돌아다니며 방황했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어머니는 재가했다. 형과 동생은 임 씨와의 연락을 꺼린다고 했다. 가족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임 씨는 현재도 사람들과의 대화를 원활히 하지 못하고 잠도 푹 잘 수 없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교대했던 불침번과 수시로 이뤄졌던 집합 때문이다. 맞지 않기 위해 늘 깨어 긴장하고 있었어야 했다. 직장에서 강압적인 태도나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다. 7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억압돼 있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다.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임 씨를 비롯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가 원하는 것은 진심어린 사과다.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어떠한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부랑자가 아니었음을 정부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됐음을 인정하기 바란다. 아울러 정부와 언론, 시민이 형제복지원 생존자를 잊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희망한다. 임영택 씨는 복지원에서의 잃어버린 7년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을 때까지 지니고 가야할 날카로운 기억이다. 그러한 그가 원하는 것은 국가로부터의 진심어린 공식 사과다.

/ 이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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